조선시대 혼례의 의미와 절차
조선시대의 혼례는 단순한 결혼식이 아닌 두 집안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드러내는 중요한 의례였습니다.
특히 양반가의 혼례는 예법에 따라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혼인 적령기와 규율
조선시대 법적 혼인 가능 연령은 남자 15세, 여자 14세였습니다.
다만 부모가 50세 이상이거나 중병이 있는 경우에는 12세부터 혼인이 가능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매우 이른 나이지만, 당시에는 16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신분별 혼례의 차이
왕실의 호화로운 혼례
왕실의 혼례는 '가례(嘉禮)'라 불렸으며, 납채, 납징, 고기, 책비, 친영, 동뢰의 육례로 진행되었습니다. 왕비 간택 이후에는 빙재와 별궁예물, 정찬예물, 본방예물 등 수많은 예물이 오갔습니다.
양반가의 혼례
양반가의 혼례는 왕실의 의례를 본떠 진행되었으나, 규모는 작았습니다. 그럼에도 1834년 기록에 따르면, 한 번의 혼례비용이 중인 열 집의 재산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18세기 말~19세기 초)의 양반가 혼례에 대한 내용을 재구성해보겠습니다.
양반가의 혼례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사치스럽고 화려해졌습니다. 특히 혼례 행렬은 그 집안의 위세를 과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19세기 초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따르면, 신랑은 백마를 타고 보랏빛 비단 단령을 입고 물소 뿔로 만든 띠를 두르고 사모를 썼습니다.
신부의 행렬은 더욱 화려했습니다. 신부는 8명이 메는 황동 장식의 팔인교를 타고, 청사초롱 네 쌍이 앞을 밝혔습니다. 12명의 여종들이 짝을 지어 혼수를 나르며, 대추, 포, 옷 상자, 경대, 부용향 등을 들고 행렬을 이끌었습니다.
18세기 후반의 혼례 비용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예를 들어, 유희춘이라는 양반이 손자의 혼례 때 보낸 예물함에는 현훈, 홍사, 자단자, 압두록, 청릉, 명주 등 값비싼 수입 비단들이 가득했습니다. 1767년 당시 한양(현재의 서울)에서는 혼례 비용으로 50냥이 들었는데, 이는 쌀 450되(약 45가마)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특히 신부가 시부모에게 인사드릴 때 드리는 예물도 신분에 따라 엄격히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당상관의 딸은 여자 종 4명과 남자 종 14명까지 데려갈 수 있었으며, 술 한 동이와 다섯 가지 반찬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치스러운 혼례 문화는 사회적 문제가 되어 정조 때에는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혼수와 예물로 본 조선시대 사회상
신랑 측의 예물
신랑 집에서는 납폐라는 절차를 통해 예물을 보냈는데, 이는 집안의 위세를 과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실제로 유희춘이라는 양반은 손자의 혼례 때 현훈, 홍사, 자단자, 압두록, 청릉, 명주 등 값비싼 비단을 예물로 보낸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부 측의 혼수
신부 집에서는 의복, 장신구, 가구 등 새살림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신부 집에서 준비하는 혼수가 점점 늘어나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혼례 복식의 특별함
조선시대 혼례는 신분 차이를 넘어서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평민도 이날만큼은 양반의 복식을 착용할 수 있었습니다. 신랑은 관복을, 신부는 왕실 여성들의 예복이었던 활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혼례의 부작용과 사회적 문제
사치의 만연
1522년 중종 때는 왕실의 혼례가 너무 사치스럽다는 비판이 있었고, 연산군 때는 사헌부가 나서서 혼수품 규정을 만들 것을 주청했습니다. 특히 금은주옥으로 된 갓끈과 장신구 사용을 금지하고, 사치스러운 혼례 잔치를 단속하기도 했습니다.
혼례 비용 문제
과도한 혼례 비용으로 인해 혼기를 놓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관아에서 혼례 물품을 대여해주는 제도가 있었고, 혼사계(婚事契)를 구성하여 물품을 공동으로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영향
조선시대의 혼례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혼수와 예물을 통해 집안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경향이나, 결혼식이 두 집안의 결합이라는 인식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발견됩니다.
과거 양반가의 혼례가 보여주었던 사치와 낭비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할 중요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